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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신라를 뒤흔든 16인의 화랑

신라를  뒤흔든  16인의 화랑
  • 저자이수광
  • 출판사풀빛
  • 출판년2013-09-02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3)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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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전성기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 화랑. 그들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도전해 복원한 최초의 역사 팩션!



    신라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화랑, 외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열세한 신라의 군사력을 보강하면서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고 내적으로는 법흥왕 이후 왕권강화의 선봉으로 활약하다가 삼한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끌어낸 주역.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표면적인 모습에 불과하다. 과연 천년 전 화랑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신라사회 내에서 하나의 막강한 권력집단이기도 했던 화랑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시키기 위해 어떤 과정을 겪어야만 했는지, 또한 그 과정 속에서 신분제라는 벽에 부딪쳐 화랑이 될 수 없었던 서민들은 어떻게 대응했었는지, 그리고 이들 화랑의 일상사와 문화는 어떤 것이었는지 등의 이야기가 바로 이 책 《신라를 뒤흔든 16인의 화랑》에 속속들이 드러나 있다.

    특히 이 책은 화랑에 대한 기록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역사서 《화랑세기》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화랑의 참모습을 복원해낸 최초의 시도라 할 수 있다.

    《화랑세기》는 1세 풍월주(風月主, 화랑의 우두머리) 위화랑부터 32세 풍월주 신공까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에는 그런 기록이 부분적일 뿐이다. 더구나 당시 신라인들의 자유분방한 애정 행위나 생활 풍속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기록의 진실성 여부가 분명하지 않아서 오늘날까지 위서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가 없었다면 우리가 신라 화랑들의 실상에 접근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이 책 《신라를 뒤흔든 16인의 화랑》은 《화랑세기》에서 그 활약상이 두드러졌던 16명의 화랑을 선정해,《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을 근거로 법흥왕에서 문무왕에 이르는 140년간의 화랑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이는 《화랑세기》에 기록된 화랑 개개인의 이야기, 즉 개인사를 당시 신라의 정치ㆍ사회ㆍ문화사로까지 확장시켜 화랑의 실상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간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독자들이 신라 화랑의 실제 모습을 보다 리얼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설적 기법을 활용해 일종의 역사 팩션으로 재구성했다. 이는 필자 이수광 씨가 그동안 우리 역사 속에 숨겨진 인물들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기도 하다.





    화랑을 통해 당시 신라의 정치 사회 문화 성풍속도까지 속속들이 파헤치다!



    귀한 집안의 자제 가운데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곱게 가꾸고 단장시켜,

    화랑이라 이름붙였다. 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 名曰花郞. -《삼국사기》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화랑은 귀족의 자제 가운데 얼굴이 아름다운 자들을 선발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있는 집안의 꽃미남’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뽑은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여러 갈래지만 아마도 종교적인 의식 또는 성적인 판타지 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꽃미남이라는 측면보다 이들이 귀족의 자제라는 점이었다.

    알다시피 신라는 골품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신분제 사회였고 귀족 출신인 화랑은 성장한 뒤 지배층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화랑제도가 창설되던 6세기 중엽은 법흥왕, 진흥왕으로 이어지는 왕권 강화의 시기였다. 따라서 화랑으로서 적게는 몇 십 명에서 많게는 몇 백 명에 이르는 낭도 조직을 거느리게 된다면 그 세력은 막강했다. 따라서 공식적인 화랑제도가 성립되면서부터 이들은 왕권의 전위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왕권의 향방을 좌우할 정도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떤 왕을 세울 것인지 귀족과 화랑들 사이에서는 은밀하고도 긴밀한 물밑 작업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세가 규합되거나 갈라지는 갈등구조들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이는 그들의 후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예는 화랑의 신이라 불리던 문노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문노의 아버지 비조공은 지증왕 다음의 왕위 계승자로, 법흥왕이 아닌 영실공을 지지해 왕권 쟁탈전에서 패배함으로써 관직에서 밀려난 인물이었다. 또한 어머니는 신라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가야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문노가 화랑 가운데 아무리 자질이 뛰어난 인물이여도 풍월주에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간에서 화랑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문노는 무예와 인품이 뛰어났지만 그가 가르쳤던 세종이나 설원보다도 늦게 풍월주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신라 귀족 사회를 지탱하는 힘의 한 축이 여성이라는 측면도 매우 독특한 내용이다. 신라에는 왕이나 귀족을 배출하는 두 개의 여성 혈통, 즉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 존재했으며 이 계통(인통)은 어머니에서 딸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원신통을 잇고자 하는 귀족은 대원신통인 아내를 맞아들여 자녀를 두면 그 자녀는 대원신통이 될 수 있었으나, 본인이 대원신통이라 해도 진골정통의 아내를 맞으면 자녀들은 모두 진골정통의 인통을 물려받았다. 비록 2대에 국한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전통은 모계사회의 유습이 신라 중기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전통이 있었기에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인통을 보존하기 위해 근친간의 결혼이나 애정도 서슴지 않았고 남성들은 물론 왕녀나 귀족 여인들과의 혼인, 애정, 성애 역시 매우 자유로웠다. 이 책 곳곳에 나타나는 자유로운 성애를 보면 정말 그랬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신라 토우나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되듯이 유교적 잣대가 도덕적 기준이 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였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문란한 성풍속이 아니라 신라 사회가 지닌 자연스러운 성풍속이었을 뿐이다.

    또한 화랑이나 귀족들은 서민 여성 가운데 임신한 여성들과 하나의 계약관계를 맺고 정을 통해 마복자(摩復子, 마복자란 임신한 서민 여성이 귀족과 성관계를 맺으면 뱃속의 아이는 그 귀족의 양아들로서 후원을 받아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는데, 이런 부자관계에서의 아들을 말함) 관계를 이루기도 했다. 이는 당시 서민들이 골품제의 벽을 뛰어넘기 위한 편법 또는 고육지책이었다. 이렇게 서민의 아들 가운데 일부는 화랑이나 낭도의 우두머리로 신분 상승이 되었고 이를 후원하는 화랑은 자기를 따르는 화랑이나 낭도의 수를 늘려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뿐만 아니라 화랑제도의 후기로 가면 마복자가 되기 위해 뇌물을 주고받는 폐단까지 발생해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서민의 딸 중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유화(오늘날 위안부라 할 수 있음)가 되어 30세가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낭도들의 유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는 신라사회에서 평민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 시련인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처럼 이 책은 신라 사회의 정치사는 물론이고 그 이면에 있는 사회사, 문화사, 성풍속사까지 다양한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라 골품제의 실상은 물론이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귀족들의 암투,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신라시대를 살아간 다양한 인물들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들여다 볼 수 있다.





    신라 정치사를 들여다보는 거울 … 화랑제도의 창설에서 폐지까지



    화랑제도를 공식적으로 설치한 것은《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576년(진흥왕 37)의 일이라고 나오지만 《화랑세기》에 의하면 540년(진흥왕 원년)으로 보고 있다. 이 책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화랑 사다함의 활약 시기가 560년대의 일이기 때문에 화랑제도가 설립된 것을 540년으로 보았다. 더구나 당시 신라는 밖으로는 주변의 고구려나 백제의 잦은 침략으로 대외적 압박을 받고 있었고, 안으로는 귀족 회의체인 화백회의가 있어 모든 국가의 중요 정책은 귀족들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법흥왕 시절부터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 대외정복 사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진흥왕 시대 역시 법흥왕을 이어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키울 수 있는 새로운 장치가 필요했다. 이에 진흥왕의 섭정이었던 지소태후와 왕실파인 이사부가 착안한 것이, 불교를 받아들이기 전부터 선도 사상을 바탕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무예를 익히는 젊은 남자들, 즉 풍류도 또는 화랑도였다. 민간의 자생조직인 이들을 흡수해 왕권 강화와 강력한 군사조직으로 편입될 인재 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랑의 창설 목적이었다.

    화랑제도가 자리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국교로 공인된 불교와 결합을 모색했고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세속오계였다. 이제 화랑제도는 신라 사회를 정신적으로 이끄는 불교와 사상적 통일을 이루게 되었고 우두머리 풍월주를 중심으로 서열을 두고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이들은 전쟁시에는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전쟁에 임했고 평상시에는 왕의 전위부대나 시위대로 활약했다. 이후 태종 무열왕 김춘추 시대가 되면 화랑이나 화랑 출신 군인들이 신라 귀족사회의 주류가 되기에 이른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이 삼한통일의 주역 김유신이었다.

    이렇게 화랑제도는 삼한통일 이전까지는 인재양성소이자 군사조직으로 신라인의 기상을 높이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통일이 되고난 뒤부터 상대적으로 화랑의 기강과 규율도 해이해지고 그들이 맡았던 군사적인 역할들이 약해지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화랑들은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에 앞장서게 되고 화랑조직도 부패와 비리가 만연하게 된다. 백성들과 서민들이 부인과 딸 그리고 뇌물을 바치고 화랑들 스스로가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에서 신라 통일기의 화랑정신이 살아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풍월주인 보리와 예원이 이를 개혁하려고 했으나 그 뿌리까지 제거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682년(신문왕 1년) 27세 풍월주였던 흠돌이 반란을 일으켰고 수많은 화랑들이 연루되면서 화랑제도는 일시적으로 폐지되기에 이른다. 이후 지방에 남아 있던 화랑조직들이 활동을 전개하면서 다시 부활되었으나 이미 화랑제도는 유명무실한 상태로 되어 민간조직 시절과 같은 역할로 남기에 이른다.

    이렇게 화랑제도의 창설과 폐지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신라시대의 정치사가 한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16명의 화랑을 통해 본 신라(중기)의 정치.사회사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그나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화랑의 세계가 일부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의 부속물에 불과했을 뿐이다. 드라마의 주축이 선덕여왕과 미실이라는 두 여성이었고 진평왕과 선덕여왕 시대에 화랑을 논하기도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신라 중기의 전성기를 만들어내고 이끌어갔던 대표적인 화랑들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진실과 마주치며 발굴하고 건져낸, 우리나라 최초의 화랑의 역사라고 자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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