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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노구를 민족제단에 바친 의열투쟁가 강우규

노구를 민족제단에 바친 의열투쟁가 강우규
  • 저자정운현
  • 출판사역사공간
  • 출판년2017-01-06
  • 공급사아카디피아 전자책 (2015-02-01)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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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령 의열투쟁가 강우규 항일투쟁은 조직적,집단적인 형태와 함께, 개인 차원의 ‘특공작전’ 방식인 의열투쟁이 하나의 독립운동방략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의열투쟁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약소(弱小)세력들의 대표적인 투쟁방략 가운데 하나였다. 강우규는 6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3?1만세운동 여파로 하세가와 총독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가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폭살키로 결심했다. 그리고 1919년 9월 2일 사이토가 부산을 거쳐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하자 그를 향해 폭탄을 던져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강우규 의사의 사이토 총독 폭살의거는 우리 독립투쟁사에서 두 가지 독특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첫째,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민족진영에서 독립투쟁의 한 방략으로 정립된 의열투쟁 노선을 실천한 점이다. 이것은 1908년 3월 23일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리부두에서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일과, 이듬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두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맥을 강우규 의사가 이었다고 할 수 있다. 3?1만세운동 과정에서 일본 군경에 저항한 무수한 항일투사들이 있었지만 식민통치의 최고책임자인 조선총독 제거를 목표로 거사를 준비한 사람은 드물었다. 강 의사는 의거 처음부터 목표를 조선총독으로 잡고 주도면밀한 준비를 통해 거사를 결행했다. 비록 총독을 척살하지는 못했지만 강 의사의 의거가 항일투쟁사와 동양사에 끼친 영향을 감안하면 소기의 성과는 충분히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한국 독립운동사상 최고령자의 폭탄투척의거라는 점이다. 의열투쟁에 나선 대부분의 의?열사는 20~30대 청장년층이었다. 반면 의거 당시 강 의사는 만 64세였다. 당시 평균수명이 50세도 채 안된 점을 감안하면 강 의사의 의거는 당시로선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강 의사가 의거 후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은 이유 역시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강 의사의 의거는 이후 여러 청년에게 영향을 미쳤다. 강 의사의 의거 후 민족진영의 청장년들이 의열투쟁 대열에 대거 동참하였는데, 약산 김원봉이 결성한 의열단과 상해임시정부에서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의사는 의열단원이었으며,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원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강 의사의 뒤를 이은 청년 의?열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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