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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역사, 선비의 서재에 들다

역사, 선비의 서재에 들다
  • 저자배한철
  • 출판사생각정거장
  • 출판년2019-03-13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9-05-08)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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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의 눈으로 바라본 우리 역사

    이제까지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48권의 고전에서 길어올린 우리 역사의 진면목!!

    사소하지만 생생하고, 낯설지만 자유롭다

    실록 밖에서 찾아낸 새로운 역사





    ‘기록의 나라’ 조선은 왕이 사망하면 그가 재위하는 동안 있었던 모든 일의 기록을 엮어 실록으로 남겼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0여 년 동안 시간순으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한, 1893권 888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역사서다. 과연 ‘기록의 나라’라는 이름에 걸맞은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록 밖에도 역사는 존재한다.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학문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사대부들은 방대한 저작물을 양산해냈다. 시와 수필, 상소, 행장, 비문 등 형식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정치, 제도, 과학, 역사, 인물, 세태, 풍속 등 다루는 분야도 실로 광범위하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경제가 발전하고 신분제도가 느슨해지면서 일부지만 여성은 물론, 중인 이하의 하층민들도 기록물을 생산하여 우리의 기록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남긴 저작물에는 실록에서 다루지 않은 사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또 실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개인들의 자유로운 기록이다 보니, 자신들이 살핀 왕의 인간적인 면모부터 널리 알려진 위인들의 바람기, 민초들의 고단한 삶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게다가 양념처럼 해학과 풍자까지 함께 녹아 있다. 저자 배한철이 율곡의 《석담일기》에서 《어우야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전에 주목한 이유다. 개인이 남긴 문집과 야사집 등을 통해 실록에서 다루지 않은 뒷이야기를 발굴함으로써 진실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저자가 다양한 고전을 통해 역사를 이렇듯 새롭게 해석한 것은 역사가 엄숙하고 준엄한 의식으로 무장한 무거운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평소 지론 때문인지도 모른다. 왕부터 천민까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과 삶이 모여 역사가 된다. 그렇기에 저자는 다양한 관점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라고 이야기한다. 박물관과 종갓집을 종횡무진 누비며 만난 다양한 고전과 그 속에 숨은 이야기, 그리고 다양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독자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고전으로 역사의 퍼즐을 맞추다

    ? 사도세자는 정말 노론의 희생양일까

    ? 선조는 정말 무능한 군주였을까



    태종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한 세대를 건너 손자인 세조가 다시 조카인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는 비극이 반복됐다. 그러나 태종과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평가는 건조하게만 느껴진다. 건국 초기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다는 식이다. 물론 그 또한 사실이지만 실록의 편찬자들 역시 태종과 세조를 좇던 무리였기에 어쩌면 이 같은 평가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말이 전해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인 평가는 실록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태종과 세조의 행동이 패륜이며 불충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실록이 정본에 가까운 역사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실록만을 역사의 전부로 바라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에서 이 같은 경우를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심각하고 첨예한 문제일수록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진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임오화변은 그 자체로도 끔찍한 사건이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죽인 지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영조를 왕위에 앉혔던 노론이 정치적으로 소론의 손을 들어주던 사도세자를 음해하여 제거했다는 견해가 전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훗날 정조의 생각이 반영된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 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심각한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기록한다.



    사도세자는 ‘의대증衣帶症’이라는 희귀병도 앓았다. 옷을 갈아입기를 고통스러워하는 강박증이다. 혜경궁 홍 씨는 “옷을 한 번 입으려면 스물에서 서른 벌의 옷을 준비해야 한다”며 “입지 못한 옷은 귀신을 위해 불태우기도 했다”고 했다. …(중략)… 게다가 사도세자가 마음을 의지했던 정성왕후, 인원왕후가 같은 해 승하하자 세자의 증상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그해 6월 화증이 더하여 사람 죽이기를 시작했다. 내시 김한채를 죽여서 그 머리를 잘라 들고 다니면서 내인들에게 둘러보였다. 혜경궁 홍 씨는 “내 그때 사람의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으니 흉하고 놀랍기 이를 것이 있으리요”라고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세자는 사람을 죽이고야 마음을 풀리는지 내인 여럿을 죽였다.



    이처럼 실록에 나와 있는 사실에 개인들이 남긴 기록을 더해 종합하면 보다 진실에 가까운 역사를 만나게 된다. 선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선조가 다가오는 전쟁의 위협에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무능한 군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율곡 이이의 문집 《석담일기》에 그려진 선조는 우리의 선입견과 많이 다르다. 학문과 예술, 인재를 사랑하고 검소하게 백성의 고통을 보듬을 줄 아는 임금으로 그려진다. 세상 어디에도 선하기만 한 사람, 혹은 악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하고 좋은 점이 있는 반면, 부족하고 나쁜 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역사는 사건이나 인물의 단선적인 면만을 기술하기 때문에 좋거나 혹은 나쁜 면만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속성에 주목해 50여 권에 달하는 다양한 고전을 뒤져서 정사에서 다루지 않았으나 사건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발굴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역사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간다. 그렇게 사건과 인물의 진면목, 진짜 역사에 다가선다.





    우리가 알던 위인들의 새로운 모습

    ? 단종의 비를 탐했던 뻔뻔한 신숙주

    ? 처갓집 여종과 바람피우다 걸린 이항복



    고전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위인들의 의외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 결국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른 신숙주는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김택영이 쓴 역사서 《한사경》을 보면, 신숙주가 세조에게 단종의 비 정순왕후를 자신의 첩으로 달라고 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전해진다. 윤근수의 《월정만필》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도 같은 내용이 전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한때 군주로 모셨던 단종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친구들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정순왕후를 자신의 첩으로 삼으려 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후 신숙주와 그의 가문은 승승장구했으나 사람들은 그의 이런 삐뚤어진 탐욕을 이야기하며, 조카의 왕위를 탐한 세조보다 군주의 아내를 탐했던 신숙주가 오히려 더 악독하다고 욕했다.

    신숙주처럼 후대에 크게 지탄을 받을 만한 심각한 이야기도 있지만, 《고금소총》이나《어우야담》 같은 민담과 야사에 등장하는 위인들의 모습은 엄숙하고 단정한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냄새 물씬 나는 익살스러운 모습이다. 오성과 한음 설화의 주인공 이항복은 도원수 권율의 딸과 혼인하면서 데릴사위가 되어 처가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항복은 처갓집 여종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뻔뻔스럽게도 장인에게 책 읽을 조용한 독서당을 얻어달라고 해서 본격적으로 여종과 바람을 피우다가 장인 권율에게 딱 들킨다. 그 다급한 상황에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농담으로 넘기는 이항복에 권율도 할 말을 잃고 따라 웃는다.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런 성격을 가진 이항복이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들과 관료를 어떻게 대했을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처럼 역사에는 권력 투쟁과 국가의 운명 같은 무겁고 엄숙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다. 황희나 퇴계 이황, 율곡 이이처럼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은 물론이고 신사임당, 황진이와 같은 여인들, 노비 출신이었지만 정승이 된 반석평과 같은 이들이 삶이 하나하나 모여 역사가 되는 것이다. 실록에 기록된 역사적인 사건들의 흐름에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피는 것도 역사의 본 모습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제까지 역사는 언제나 왕이나 권력의 중심에 있던 신하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에게 더 의미 있고 친근한 역사는 오히려 그 중심에서 멀리 있는 것들과 더 깊이 연결되어 있다. 어느 이름 없는 선비의 서재에 꽂혀 있던 문집에 담긴 생소한 이야기가 진짜 역사의 빈 부분을 채워주는 조각이 된다. 평면적인 역사에 인물들의 성격과 전후 사정을 풍성하게 덧붙여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훨씬 더 자유로워서 새롭고 재미있는, 날 것 그대로의 역사가 전해진다.



    ◆ 책 속으로



    죽천 이덕형은 《죽창한화》에서 세종대왕이 형 효령대군의 증손녀를 지방의 한미한 집안 선비와 강제로 결혼시킨 비화를 거론한다. 세종대왕은 여러 대군, 왕자들과 함께 제천정(한남동에 있던 정자)에서 잔치를 벌였다. 마침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강을 건너느라 강어귀가 꽉 찼다. 세종은 그들 중 유독 의관이 남루하고 얼굴이 수척한 한 유생을 골라 불러오게 했다. 세종은 예를 다해 선비를 맞고 이름을 물었다. 선비는 “영남의 현석규”라고 답했다. 세종은 주위를 둘러보며 “여기 누가 혼기를 맞은 여식이 있소”라고 물었다. 형인 효령대군이 나서 “제 손자 서원군에게 혼기가 찬 딸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세종은 “만일 사위를 얻으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효령대군은 “가문이 대등하지 못하다”고 거절했지만 세종은 “영웅이나 호걸인 선비들이 초야에서 많이 나왔으니, 이 선비집 아들과 정혼하도록 하시죠”라고 고집을 피워 결국 혼인이 성사됐다.

    - 29p



    선조는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었다. 율곡 이이는 “(선조가)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외모가 깨끗하고 빼어나다”고 묘사했다. 《석담일기》에 따르면 선조는 학문을 즐겨 웬만한 학자들보다 학식이 높았다. 명종도 하성군(선조의 왕자 시절)을 볼 때마다 “덕흥(선조의 친부, 명종의 이복형)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며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선조는 ‘도학군주’를 자처하면서 경연에 나오기를 즐겼다. 경연에서 던지는 질문이 날카롭고 깊이가 있어 강관들도 강의를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박순은 시강하고 나오면서 “임금은 정말 영명한 군주”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석담일기》는 서술했다.

    - 41p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의 조상으로 유명한 노비 반석평의 일화도 소개한다. 반석평은 재상가의 노비였다. 비록 신분은 천했지만 성품이 바르고 영특했다. 재상은 그 재주를 아껴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글을 가르쳤으며 반 씨 성을 가진 부잣집에 입양시켰다. 반석평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이 정2품 지충추부사에 이르렀다.

    반면, 재상집은 재상이 죽은 뒤 몰락한다. 반석평은 재상의 자식들을 거리에서 만나자 마차에서 내려 절을 올렸다. 반석평은 그러면서 나라에 글을 올려 국법을 어기고 벼슬에 오른 죄를 스스로 실토하면서 처벌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를 오히려 의롭게 여겨 후하게 장려하고 국법도 파기했다.

    - 95p



    묵재 홍언필洪彦弼, 1476~1549과 인재 홍섬洪暹, 1504~1585은 ‘부자 영의정’으로 명성을 떨쳤다. 인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묵재 홍언필은 재물을 멀리한 원칙주의자였다. 자식들조차 옷을 갖추지 않고서는 만나지 않을 만큼 법도를 엄격히 지켰다. 선조 때 영의정을 3번이나 중임한 아들 홍섬 역시 경서에 밝았으며 가풍을 이어받아 검소하기까지 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고금소총》에는 이들 부자의 전혀 다른 모습이 소개된다. 홍섬은 여종들과 무분별하게 어울렸다. 한여름 밤 여종들이 방에 흩어져 자고 있었는데 홍섬은 알몸으로 자신의 방에서 몰래 나와 평소 눈여겨보았던 여종을 찾기 위해 여종들의 방을 살금살금 기어다녔다. 아버지 홍언필이 인기척에 깨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리고 “아들이 장성한 줄 알았더니 이제 막 기어가는 것을 배운 모양이구나”라고 소리쳤다. 깜짝 놀란 홍섬은 놀라 달아났다.

    - 158p



    조선은 ‘모자의 나라’였다. 식사를 할 때도 겉옷은 벗더라도 모자만은 반드시 썼다. 그런데 갓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덕무의 《앙엽기》의 한 대목이다. “갓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나룻배가 바람을 만나 기우뚱거릴 때 조그마한 배 안에서 급히 일어나면 갓 끝이 남의 이마를 찌르고 좁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에는 남의 눈을 다치게 하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난쟁이가 갓 쓴 것처럼 민망하다. …(중략)… 모자를 중시하는 풍습은 이미 고려 때도 존재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은 “고려인은 모자를 쓰지 않은 맨머리를 죄수와 다름없다고 수치스러워했다. 무늬가 들어간 비단 재질의 두건을 소중히 여겨 두건 하나의 값이 쌀 한 섬에 달했다. 가난한 백성은 이를 마련할 길이 없어 죽관을 만들어 썼다”고 기록했다.

    - 263p



    세계인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한국인의 쌈은 독창적이면서도 건강에도 좋은 식품이다. 우리의 쌈 문화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상추는 쌈 문화의 대표주자이다. 상추라는 말은 채소를 날 것으로 먹는다는 뜻의 ‘생채生菜’에서 유래한다. 고구려인들이 상추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한치윤의 《해동역사》에는 고구려의 상추씨가 중국에서 인기 절정이었다고 서술한다. “고려국 사신이 오면 수나라 사람들이 채소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후하게 쳐줘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했는데 지금의 상치다. …(중략)… 고구려 사람들은 생채로 밥을 싸 먹는다.”

    - 306p.



    고종 32년(1895) 위세를 떨치던 콜레라가 잠잠해지던 10월 8일, 경복궁에서 엄청난 참극이 발생한다. 그날 새벽 언더우드 부인은 대궐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불길한 징조를 느꼈다. 그리고 왕비가 죽었다. 공격 부대는 총을 쏜 뒤 아무런 저항 없이 대궐 안으로 쳐들어갔다. 의화군(의친왕)이 총소리를 듣고 도망치자고 왕비에게 간청했지만, 대비를 홀로 남겨두고 갈 수 없다면서 의화군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정병하가 “두 분 전하(고종, 명성황후)는 안전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언더우드 부인은 정병하를 가리켜 “천한 사람이 왕비 덕에 출세하고 큰 은혜를 입었는데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암살자의 하수인이 됐던 것”이라고 했다. 적의 무리는 가련한 왕비를 찾아내 찔러 죽였다.

    - 4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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